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자산어보』는 2021년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전과 평민 어부 창대가 전혀 다른 신분과 가치관을 넘어 지식과 사람에 대해 교류하며 만들어가는 성장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정약전(설경구)은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조선 바다 생물들을 연구하며 책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물고기와 바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바다를 삶으로 살아온 어부 창대(변요한)입니다. 처음엔 신분의 벽과 생활 방식의 차이로 갈등하지만, 두 사람은 점차 ‘공부’와 ‘배움’, ‘사람과 사람’에 대한 진심을 공유하게 되며 서로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 영화는 물고기 도감이라는 소재 안에 민중과 지식인의 교류, 신분제의 벽을 허무는 인간 중심의 시선을 담아내며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시대적 배경과 실학의 의미
『자산어보』의 배경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조선 후기, 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입니다. 이 시기는 조선의 보수적인 사대부 중심 체제가 흔들리고, 실학자들이 민중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한 격동기입니다.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수많은 실학자들이 유배되었고, 그들은 중앙 권력에서 멀어진 자리에서 오히려 백성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유의 전환을 경험합니다.
정약전은 실제로 『자산어보』라는 책을 통해 흑산도의 어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는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지식이 더 이상 양반만의 것이 아닌 민중과 나누어야 할 도구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흑백 영상미를 통해 당시의 시대감과 진정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시간을 초월한 진정한 배움의 가치를 담백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과 배우들의 연기
『자산어보』는 단 두 명의 주인공, 설경구(정약전)와 변요한(창대)의 연기력으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설경구는 기존의 강렬한 캐릭터와는 다른, 조용하고 사유적인 실학자의 면모를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표현하는 정약전은 책 속에 갇힌 양반이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알아가는 인간적인 지식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변요한은 강한 현실 감각을 지닌 어부 창대로 분해, 거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과 배우려는 열정 사이에서의 갈등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두 사람의 연기 호흡은 마치 물과 바다, 책과 생명이 만나는 조화처럼 자연스럽고 깊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조연진 역시 훌륭하며, 짧지만 인상 깊은 인물들이 영화의 리듬을 잃지 않게 도와줍니다. 특히 흑백 영상 안에서 배우들의 표정, 숨결, 감정선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며, 묵직한 감정의 파동을 일으킵니다.
국내외 평단과 수상 반응
『자산어보』는 국내에서 2021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설경구)을 수상하며 그 해 가장 의미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았습니다.
평론가들은 “지식인의 진정성과 배움의 자세를 고요하게 그려낸 수작”이라고 평가했고, 관객들 역시 “느리지만 깊은 감동의 영화”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흑백의 미장센과 영상미는 한국 영화가 시각적으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힙니다.
해외에서도 호평이 이어졌으며, 제24회 우디네 극동영화제, 도쿄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영되며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했습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심리와 사상의 깊이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많은 해외 언론이 주목했고, 이는 한국 전통 영화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자산어보』는 화려한 액션도, 큰 사건도 없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지식과 민중, 배움과 가르침, 양반과 평민이 맞닿는 지점에서 탄생한 이 영화는 시대를 초월한 진정한 인간성과 배움의 철학을 말합니다. 백상예술대상의 수상은 그 가치가 시대성과 예술성 모두에 기반한다는 증거이며, 『자산어보』는 지금 이 시대에도 충분히 필요한 영화입니다.